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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2015

Earvin Johnson Jr. 매직존슨 커리어



농구를 전혀 다른 스포츠로 변화시킨 선수들이 있다. 1950년대의 밥쿠지, 1960년대의 오스카 로버트슨, 1970년대의 줄리어스 어빙, 1980년대의 매직존슨, 1990년대의 마이클 조던. 물론 이 위대한 선수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사람들 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농구에 일대 변혁을 가지고 왔던 인물들이고 특히나 매직존슨의 그 경이로움은 농구 팬들로 하여금 큰 충격과 재미를 선사했다.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다재다능한 선수, 어빈존슨의 커리어에 살펴보자.



장신의 포인트 가드


많은 재능있는 포인트가드들이 있었다. 뛰어난 공격기술을 가지고 림을 공략하던 선수도 있었고 침착한 운영과 완급 조절, 투맨 게임을 이끌어 가던 포인트 가드도 있었다.

하지만 매직 존슨은 가장 특이한 포인트 가드였다. 파워포워드로서도 경쟁력 있는 준수한 신체를 보유했던  그는 자유로운 경기운영과 놀라운 패싱센스는 별명 '매직'과 너무도 잘어울리는 것이었다.

매직존슨

아직도 노-룩 패스하면 매직 존슨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카메라맨도 당황시켰던 예측할 수 없는 그의 패스는 동료들에 의해 득점으로 마무리 되었고, 코트 어느 지역 - 어떤 자세에서도 볼을 전달 할 수 있었던 움직임과 표정에 많은 사람들이 황홀해 했다.

진정한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로서 트리플 더블이라는 용어에 가장 잘어울리는 이 선수를 사람들은 가장 다시 보기 힘들 스타일의 선수로 추억하고 있다.

매직존슨의 어시스트



고등학교 시절 '매직'으로 불리다    


아홉 형제와 미시간주 랜싱에서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어빈 존슨 주니어는 하루 종일 볼과 함께 놀았다. 오른 손으로 가게를 향해 나아갔고 왼손으로 드리블 하며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농구공을 튀기며 시간을 보낸 후 잠들때에도 농구공을 안은 채 였다고 한다.

에버렛 고등학교에 입학한 존슨은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5세였던 예비학교 학생 신분으로 참가한 경기에서 36점 16리바운드 16어시스트를 기록하게 된다. 이러한 활약을 본 한 기자가 '매직'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존슨의 어머니는 이 '매직'이란 별명을 싫어했다고 한다. 신성을 모독한다고 불경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별명과 같이 존슨은 졸업반이 되었을 때 자신의 고교를 27승 1패로 이끌었으며 미시건 주 우승을 안긴다. 28.8득점 16.8리바운드의 기록은 마법과 같은 것이었다.



미시건 주립 대학, 그리고 라이벌의 시작


 ABA와 NBA가 통합되면서 농구의 인기는 높아져가고 있었다. 카림 압둘자바와 줄리어스 어빙의 등장은 농구가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농구를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한, 역사적 라이벌의 탄생이 있었다.

 미시간 주립대학에 입학한 존슨은 높은 명성을 얻게 된다. 경기당 17.0점 7.9리바운드, 7.4어시스트의 기록을 남겼고 본격적인 '매직'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존슨 자신의 이름보다 별명이 더 친숙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1학년으로서 주전 가드였지만 그가 가진 큰 키와 강한 웨이트는 포지션에 국한되지 않는 큰 활약을 가져왔다. 3월의 광란, 64강 토너먼트 첫출전에서 승승장구하며 존슨은 큰 활약을 한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캔터키 대학에 패하고 만다. 

그리고 1979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3월 초에서 2월 말로 바뀌게된 초유의 사태는 NCAA의 대 라이벌전 때문이었다.

매직존슨의 미시건 주립대는 초반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매직 존슨이 포워드 자리에서 활약을 선보이며 결승으로 이끈다. 

매직과 버드

인디애나 대학에는 NCAA 역사상 최고의 슈터라는 명성을 받고 있던 선수가 있었다. 대학내에서도 대단한, 그리고 후에 전설에 속할 래리버드가 있었다.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이 해 NCAA 결승전에서 매직존슨의 미시건 주립대는 75-64로 승리하며 우승을 한다.  후에 12년간 리그 최고의 라이벌이 될 매직과 버드의 1라운드였다.



레이커스의 선택


대학농구 최강이었던 래리버드의 인디애나를 꺾고 우승한 매직존슨은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2학년을 마친 존슨이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자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3학년이 되지 않은 선수가 드래프트에 나오는 것이 당시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래리버드는 1978년에 드래프트되었지만, 우승을 위해 한시즌을 더 뛰었고, 둘은 1979-80 시즌 NBA에 데뷔한다.

유타 재즈가 먼저 선수를 지명할 수 있었지만, 3년전 게일 굿리치와 계약하면서 1979년 1라운드 픽을 LA레이커스에 양도했기 때문에 매직존슨은 레이커스의 1순위로 지명된다.

당시 7명의 선수가 합새로 합류하며 신인 감독과 새 구단주라는 변화를 격던 레이커스는 매직존슨을 손에 넣으며 새로운 팀으로 거듭난다. 

77경기에서 평균 18득점 7.7리바운드 7.3어시스트를 기록한 매직존슨은 엘빈 헤이즈 이후 NBA 올스타전에서 선발로 출전한 첫 신인이 되었다. 11년만의 일이었다.



신인의 NBA  Final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래리버드의 보스턴을 격파하고 올라온 필라델피아 식서스에는 줄리어스 어빙과 모리스 칙스, 데릴 도킨스 같은 스타들이 있었다. 

그런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레이커스는 5차전 까지 3승2패로 리드하고 있었다. 1승만 추가하면 우승을 거머쥘수 있는 기회였지만 레이커스의 팬들은 불안했다. 

5차전에서 40득점을 올렸던 압둘 자바는 심한 발목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압둘 자바 없이 남은 게임을 모두 치러야 하는 레이커스로서는 우승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경기가 되었던 6차전, 사람들은 경기를 보는 내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기대를 걸었던 스무살의 신인이 대 활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1980 NBA Final game6

선발 출전 명단의 센터 부분에 매직존슨의 이름이 있었다. 부상이었던 압둘 자바를 대신하여 센터로 출전하게된 신인가드. 골 밑에서 수비하며 속공을 지휘하고 코트를 휘저었던 매직존슨은 42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 3스틸이라는 대활약을 하며 레이커스에게 우승을 안긴다. 그리고 본인은 NBA Final MVP 수상의 첫 신인이 된다.



영광 이후의 최악의 시즌


MVP의 영광도 잠시, 그 다음 시즌인 80-81시즌은 매직존슨에게 최악의 시즌으로 남아있다.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쉬어야 했다. 애틀랜타 호크스의 톰 버레슨과의 충돌로 왼쪽 무릅에 부상을 당했다.

7피트 2인치에 달하는 톰버레슨은 존슨에게 45경기 결장이라는 뼈아픈 시기를 겪게 했다. 정기시즌의 절반이상을 출전하지 못한 그는 플레이 오프 일정에 맞추어 돌아왔지만, 휴스턴 로켓츠에 맞서 승리를 이끌진 못하였다. 로켓츠와의 3차전에서는 12개의 야투중 2개만을 성공하는 등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했다.



명장 펫 라일리 감독 시대의 시작


부상이후 단단히 벼르던 81-82시즌, 웨스트헤드 감독은 공격방식의 변화를 구상했다. 하지만 존슨은 이런 감독과 충돌을 빚는다. 존슨은 감독과의 갈등을 표면화 시키며 공개적으로 감독이 레이커스를 떠나야 한다고 비난했다.

결국 웨스트헤드 감독은 해고되고 어시스트 코치로 있던 팻라일리가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존슨을 비난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반영된 듯 올스타 투표에서 주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부상으로 이름을 올리지 못한 시기를 제외하면 선발되지 못한 유일한 한 해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실력으로 대답하겠다는 의지의 존슨은 그해 좋은 활약을 함으로써 그를 향한 야유와 질타를 눌러버렸다. NBA Final에 올랐으며 식서스와의 맞대결에서 6차전 승리로 우승트로피를 거머쥐었으며 두번째 Final MVP를 수상한다.

이후 82-83시즌 매직존슨은 처음으로 어시스트왕을 차지한다. 올 어라운더로써 출중한 기량을 선보이며 활약하며 또다시 정상에서 필라델피아와 격돌한다. 하지만 닉슨과 워디ㅜ, 메카두가 부상으로 뛸수 없었으며 주전 3명을 쓸수 없는 팀 레이커스의 한계는 여실했다. 결국 4전 전패로 파이널을 마감해야 했다.



보스턴과의 맞대결



83-84시즌 3년만의 보스턴 우승

83-84 시즌 레이커스는 또 다시 파이널에 올랐다. 이미 매직존슨은 40세를 바라보는 압둘자바에게 레이커스의 미래를 물려 받았다. 레이커스는 매직존슨에게 초대형 계약을 체결하고 그를 붙잡았다.

지난 시즌 파이널 무대에서 힘없이 쓰러졌던 레이커스는 파이널 우승을 위한 의지를 불살랐다. 79년 NCAA 챔피언쉽 이후로 처음 만나는 대 라이벌전이었다.

세기의 라이벌 매직과 버드

버드의 보스턴과 7차전 까지 가는 대 접전이 이어졌다. 하지만 시리즈 중 매직존슨은 뼈아픈 실수를 연발하며 팀의 패배를 불러왔다. 그의 라이벌인 버드는 데뷔 5년만에 정규시즌 MVP를 차지하였으며 파이널 우승과 Final MVP를 들어올렸다.


84-85시즌 레이커스의 설욕

한편, 84-85 시즌은 레이커스에게 신바람 나는 한해가 되었다. 번번히 그들을 좌절 시켰던 보스턴을 상대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148대 114라는 많은 점수 차로 승리를 따내어 '메모리얼 데이 대학살'이라 불린 1차전 이후로, 6차전에 승리함으로써 파이널 우승을 이루어 내었다. 압둘자바가 노장의 투혼을 보여주었고, 상대적으로 부상이었던 버드가 아쉬운 보스턴이었다.

파이널 우승의 매직존슨

이전까지 보스턴과 파이널 무대에서의 악연은  가혹한 것이었다. 무려 여덜번의 파이널 상대로, 보스턴에게 승리한 적이 없던 레이커스는 이 승리로서 새 시대를 시작하는 듯 했다.


85-86시즌 휴스턴 트윈타워에의 패배

래리버드가 포워드로서 슛과 프리드로우 등 부분에서 경이적인 모습을 보이며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게 되는 동안, 매직존슨은 서부지구 결승에서 충격의 패배를 당하게 된다. 당시 랄프 샘슨과 함께 트윈타워를 구축한 하킴올라주원의 휴스턴은 매직에게 패배를 안겨 주며 보스턴과 대결할 기회를 빼앗아갔다.


86-87시즌 매직 공격력의 업그레이드

라이벌인 래리버드가 슛에 관한한 전설이 되어 갈 즈음까지, 사람들은 매직의 슛에 대해서는 너무도 회의적이었다. 때문에 매직존슨은 자신의 외곽슛을 향상시켜 나아갔고, 86-87시즌은 그를 향한 시선을 바꿔놓은 해였다.

평균 23.9득점을 올려 득점력을 인정 받은 이 해, 레이커스 공격의 중심은 압둘자바에서 매직으로 넘어왔다. 생애 처음으로 MVP를 수상하였고 리그 탑스타로써 명성을 날린다.

매직존슨의 스카이훅 슛

한편, 존슨은 압둘자바에게 스카이 훅슛을 전수 받아 자신에게 맞는 형태의 기술로 승화시켰다. 보스턴을 상대로 파이널 4차전에서는 몇초를 남기고 이 훅슛을 성공시킴으로써 승리를 가져왔다.




악동들과의 전투

87-88시즌 역사적 2연패


디트로이트가 동부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했다. 아이재아 토마스와 조 듀마스, 빌 레임비어, 데니스 로드맨의 디토로이트는 동부를 재압하고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와 대결을 벌인다. 이들은 후에 배드보이즈라 불린 디트로이트 2연패의 주인공들이었다.

1988 NBA Final game 7

존슨의 '쇼타임 레이커스'는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와 7차전 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쳤다. 아이재아 토마스가 부상에도 불구하고 단일 쿼터 최고 기록을 세우지만 존슨의 '쇼타임레이커스'는 이들을 제압하고 우승을 거머쥔다.

68-69의 셀틱스 이후 첫 파이널 2연패 달성의 순간이었다. 존슨의 마법은 80년대에 무려 5번의 우승을 레이커스에게 안겼다.


88-89시즌 경이로운 자유투 마법

존슨은 커리어 동안 지속적으로 슛을 향상시켜왔다. 프로 입문 초기 8할에도 미치지 못했던 자유투 성공률이 이 해 91.1%를 기록하며 슈터로서도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두번째 시즌 MVP를 차지한 존슨의 레이커스는 플레이 오프에서도 연승가도를 달리게 된다.

하지만 파이널에서 다시 만난 상대는 배드보이즈의 디트로이트였다. 존슨은 레이커스의 3연패를 노렸지만 갑작스런 발목관절의 부상과 배드보이즈의 끈끈한 경기는 그를 좌절하게 만든다. 이 시즌은 압둘자바의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다.


89-90시즌 

존슨은 버드가 부상에 시달리는 사이에도 22득점 이상의 행진을 이어간다. 그의 활약은 계속 이어졌으며 4년동안 3번의 MVP획득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리그 최고의 선수라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레이커스는 블라디 디박을 영입하며 5번째 60승 고지를 밟았으며, 압둘자바의 빈자리를 메웠다. 배드보이즈에게서 파이널 트로피를 다시 가져오리라고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하지만 캐빈존슨, 에디존슨, 제프호나섹 등이 있는 복병 피닉스에 발목을 잡히고 만다.




시대의 전환 


90-91 시즌 MJ vs MJ

80년대 레이커스에 있어서 매직존슨은 농구의 아이콘이었다. 5번의 우승을 일구며 최고의 플레이어로 도약했던 그가 이후 90년대를 호령할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와 파이널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정규 시즌을 58승 24패로 마무리한 존슨의 레이커스는 퍼시픽 1위에 빛나는 포틀랜드를 제압하고 파이널에 오른다. 마이클 조던은 성장한 동료들과 함께 그들을 번번히 가로막았던 배드보이즈를 격파했다.

레이커스와 시카고의 파이널은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아직도 많이 회자되는 전설과 전설의 대결로서 매직 존슨이 마이클 조던에게 포스트업을 하는 모습이 남아있다.

매직 존슨과 마이클 조던의 매치업

마이클 조던은 후에 대단한 힘과 기술로 포스트업을 장기로 삼게 되지만, 아직은 존슨의 포스트업을 상대하기에 버거워 보였다. 트리플 더블의 활약을 보인 존슨과 고른 득점원들의 활약으로 레이커스는 첫게임을 승리한다.

하지만 성장한 피펜과 각성한 조던의 활약은 대단했다. 시카고는 공수 양면에서 레이커스를 압도했다. 이후 90년대를 제패할 MJ의 시카고였다. 부상으로 100%기량이 아니었던 매직 존슨이 아쉬웠다.

1991 NBA Finals Game1

결국 연속으로 게임에 지면서 레이커스는 패하게 된다. 레이커스는 패배하고 이후 시카고 불스의 3연패가 이어지지만, 존슨은 자신의 12시즌중 9번에 걸쳐 레이커스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대단한 기록을 남겼다.




충격적 은퇴, 그리고 식지 않는 열정


91-92 시즌이 열리기도 전에 NBA는 충격에 휩싸인다. 최고의 선수이며 아직 전성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리그 최고의 가드가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매직 존슨은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리고 NBA를 은퇴했다.

은퇴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식질 않았다. 은퇴했던 선수가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올스타 MVP를 수상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1992년 올스타전 MVP를 수상한 매직존슨

1992년은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88년의 올림픽에서 소련에게 패한 미국은 이른바 '드림팀'으로 불리는 꿈의 팀을 만든다. 마이클조던이 합류하게 되면서 매직존슬을 설득하다. 매직존슨은 래리버드와 함께 드림팀에서 활약하게 된다.

올림픽 금매달을 목에건 매직존슨과 마이클조던

매직존슨은 95-96시즌 중 NBA에 복귀했다. 체중이 255파운드로 불어난 매직존슨은 레이커스로 복귀하여 32경기를 소화하였다. 이때 그는 파워포워드 포지션을 소화하며 레이커스의 골밑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매직존슨은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만난 휴스턴의 벽에 가로막힌다. 그리고 다시 은퇴를 한다.








사진 출처 - NBA.com